IT혁명의 영웅들: 컴퓨터 소형화의 선구자, 윌리엄 쇼클리

2021.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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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관을 대체하라

본론으로 돌아와 진공관 컴퓨터가 만들어진 것만 해도 크나큰 발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컴퓨터가 프랑켄슈타인 같은 기이한 물품의 대접을 받는 것을 넘어 현대인의 필수품이 되기까지는 소형화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컴퓨터를 인류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꿀 수단으로 만들기를 원했고, 그러한 니즈(needs)는 진공관을 대체할 무엇인가를 찾게 하였습니다. 물론 그것을 현실화시킨다면, 노벨상을 수여해도 아깝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진공관이 하는 역할은 크게 2가지였습니다. 전기를 통하게 하거나 통하지 않게 하는 스위치의 역할과 전기신호를 증폭시켜주는 역할이었습니다. 당시 라디오와 같은 각종 전자제품도 진공관을 이용해서 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대의 전자제품들도 덩치가 크고, 발열이 심했습니다. 그런데 진공관을 대체할 트랜지스터가 발명되면서 이러한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되었고, 트랜지스터의 발명은 인류의 문명을 한 단계 진일보시킨 업적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주역이 윌리엄 쇼클리입니다. 윌리엄 브래드포드 쇼클리(William Bradford Shockley, 1910-1989)는 1910년 2월 13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쇼클리의 부모님은 미국 사람이었는데, 그의 아버지 윌리엄 힐만 쇼클리는 매사추세츠 출신으로 광산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였고, 그의 어머니 메이 브래드포드는 광산 조사관이었습니다. 쇼클리가 3살 때 가족들은 미국 캘리포니아로 팔로알토로 이주해서 정착했습니다. 쇼클리의 부모님들은 교육열이 대단한 사람들이어서 공교육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길 원했습니다. 어머니는 쇼클리에게 직접 수학을 가르쳤고, 부모님들은 쇼클리가 과학에 흥미를 느끼도록 이끌었습니다. 말하자면, 가학(家學)을 통해서 아들을 영재로 키워나간 것입니다. 쇼클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캘텍(Caltech)에서 학사학위를 받았고, MIT로 가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벨 연구소에 합류하여 전자공학을 연구하고, 고체 물리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방전 장치에 관한 기술로 특허를 받기도 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레이더에 관한 연구를 했고,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잠수함을 막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종전 후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벨 연구소로 돌아와서 고체 물리학 연구 그룹에 합류했습니다. 1930년대 벨 연구소 소장 마빈 켈리는 반도체가 전파 신호처리에 잘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반도체 증폭 개발 연구팀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윌리엄 쇼클리와 실험 물리학자 월터 브랜턴, 이론 물리학자 존 바든도 참여하게 됩니다. 따라서 1945년부터 쇼클리는 반도체 기술을 이용한 증폭기를 만드는 연구를 수행하게 되었고 이것은 곧 진공관을 대체할 장치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윌리엄 쇼클리는 자신이 책임자로 있으면서 존 바든과 월터 브래튼과 함께 이 연구를 수행했는데, 자신은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직접적인 실험은 두 사람은 주도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연구팀은 처음에는 다양한 재료들을 사용하고 여러 기술을 적용해보았지만, 해답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반도체의 접점이 신호를 증폭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연구하면서 프로젝트 진행에 큰 발전을 이루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1947년 12월 1개의 베이스 전극과 2개 이상의 점접촉 전극을 갖는 점접촉 트랜지스터(point contact transistor)를 개발하여 시연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최초의 트랜지스터를 발명하게 됩니다.

학자의 자존심이 이룬 성과

하지만 이 트랜지스터는 쇼클리가 처음에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과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브래튼과 바든이 숱한 실험의 결과로 만들어낸 것으로, 쇼클리는 자신의 특허권을 주장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오기가 발동한 쇼클리는 이때부터 한 달 동안 칩거하면서 자신만의 트랜지스터 개발에 몰두하였습니다. 결국, 1948년 1월, 반도체의 표면으로 전자가 흐르는 바든의 방식이 아닌, 반도체 결정 내부를 통과해서 전자가 흐르는 새로운 방식의 접촉 트랜지스터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며 짧은 시간에 다시 한번 기술 혁신을 이루어내게 됩니다. 그리고 1956년 세 사람은 모두 노벨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쇼클리 (이미지 출처: Physics Today)

쇼클리의 학자로서의 자존심이 사회적으로는 큰 기여를 한 셈이었습니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사회적인 관계에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을 하면서 소위 튀는 것을 경계하지만, 학자는 때로는 모난 돌처럼 고집스러움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연구에 몰두하여,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라는 말처럼 두드러지는 탁월함을 발휘할 필요가 있는 법입니다. 이후 행보를 간단하게 살펴보면 쇼클리는 자신의 공로를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벨 연구소를 떠나게 됩니다. 실리콘밸리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스탠퍼드 대학의 프레드릭 터먼 교수는 이러한 윌리엄 쇼클리를 초빙하여 스탠퍼드 대학 주변에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만들어줍니다. 노벨상 수상자가 만든 이 연구소에는 다양한 인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쇼클리는 학자적인 열정과 고집은 있었으나 사회적인 대인관계에서는 약점을 보였고, 여기에 불만을 품은 직원들이 하나둘 회사를 떠나게 됩니다. 8명의 유능한 직원들이 함께 떠났는데, 쇼클리는 이들을 8인의 배신자라고 부르며 맹비난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초기 실리콘밸리 벤처 창업의 주역들로 미국을 IT 강국으로 만드는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후일 마이크로 프로세스의 대명사 인텔을 창업하여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대규모 집적 회로 칩에 컴퓨터의 연산, 제어, 해독 장치가 모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기능적인 측면에서 중앙처리장치(CPU, Central Processing Unit)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MPU(micro processing unit)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물론 혼용해서 쓰이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컴퓨터의 핵심 두뇌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컴퓨터의 두뇌, 마이크로프로세서는 트랜지스터가 몇 개가 들어갈 수 있느냐에 따라서 그 성능이 좌우됩니다. 트랜지스터를 소형화시킬수록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성능이 높아지는데, 현대의 마이크로 프로세스는 미세한 알루미늄 실로 연결된 수백만 개의 트랜지스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텔은 최고의 마이크로프로세서 회사로, 지금까지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초적인 공로는 존 바든, 월터 브래튼, 그리고 윌리엄 쇼클리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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